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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9   과학과 도덕 (1)
2007/10/30   복거일 (9)
2007/10/21   똑똑한 멍청이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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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30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 (3)
2007/07/27   뇌가 거의 없는 사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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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세 마리
분류없음 | 2007/11/11 16:58

우리는 자연주의적 논증("A는 자연스럽다. 따라서 A는 도덕적이다.")을 대단히 많이 쓰고 있다. 이것은 좌파에게만이 아니라 우파도 마찬가지다. 기린아님의 지적처럼 자연주의적 논증은 자연이 도덕을 배신할 때에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따라서 도덕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기린아님의 결론은 이상하다. 먼저 원리적인 면에서 자연주의적 논증은 오류 논증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과학에 의해 도덕이 근본적으로 붕괴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논증이 그 자체로 옳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이 자연주의적 논증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설득전략의 면에서도 자연주의적 논증은 생각보다 허약해서 간단히 논파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이야 어떻든 어떤 도덕률을 주장하기 위해 윤리학에서도 일상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논법은 공리주의적 논증("A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다. 따라서 A는 도덕적이다.")이다. 동성애가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동성애가 유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자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린아님의 글은 자연주의적 논증에 대한 과도한 우려라고 본다. 그 글은 자연주의적 논증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 과학 일반에 대한 우려로 무리하게 전개하고 있다. 게다가 사실이나 논리에서도 결함이 있다. 나는 오히려 이 글이 읽기에 따라 잘못된 자연주의적 논증을 전파하게될 가능성(예를 들어 누군가 진심으로 소아성애나 동성애나 똑같이 도덕적 것이라고 믿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1) "과학은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를 지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통이나 종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지만 전통이나 종교 또한 진화적으로 적응된 형질이다. 만약 동성애가 자연스럽기 때문에 지지되어야 한다면, 전통이나 종교 또한 자연스럽기 때문에 지지될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는 같은 논리로 전통이나 종교를 지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이 말 자체가 이미 공리주의적이다.) 도덕을 전통이 지지하고 그 전통을 과학이 지지한다면 결국 과학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덕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2) "동성애는 유전적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병이 아니다."

동성애가 병이 아니라는 것은 유전적 기원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동성애가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에서 배제된 것은 1974년으로 이른바 "게이 유전자" 비슷한 것도 알려지지 않은 시기다. 그 사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지 동성애가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둘째, 동성애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현상이 아니다. 단적으로 출생 순서에 따른 자궁 내 환경은 남자 태아가 동성애자가 될 승산(odd)을 33% 상승시킨다. 형이 11명 있는 남자 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50%이다.

3) "친족 선택은 되갚기 전략의 특수한 경우다."

친족 선택은 rB − C > 0인 유전자의 빈도가 확산된다는 것으로 r은 친족의 유전적 연관도, B는 친족이 입을 이익, C는 내가 입을 손해를 뜻한다. 되갚은 전략은 상대방의 전략에 따라 나의 손익이 달라질 수 있는 게임이론 상황에서 상대방이 전략을 바꾸더라도 "내 이익"이 줄지 않는 균형전략이고 친족선택은 내가 입은 손해보다 "친족의 이익"이 크다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른 얘기다.

또한 유전자는 친족을 알아 볼 수 없다는 것은 기린아님의 말이 맞다. 그래서 유전자는 친족이 있을 조건 하에서 희생적 행동을 하도록 개체를 프로그래밍한다. 예를 들어 어떤 조류는 무조건 자기 둥지에 있는 새를 돌본다. 왜냐하면 자기 둥지에 있는 새는 자기 새끼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다른 새들은 기생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새끼건 기생하는 새건 무조건 이익을 보는 반면 부모새는 무조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것은 친족 선택이지 되갚기 전략으로 볼 수 없다.

4) "사람은 선긋기에 능하다."

사람이 진정으로 선긋기에 능하다면 종교나 지역처럼 거대한 집단에 충성심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1년에도 목격했듯이 얼굴도 모르는 수억의 사람과 그들과 함께 믿고 있는 신을 위해 비행기로 빌딩도 들이받는 것이 사람이다.

기린아님은 되갚기 전략으로부터 배신자를 기억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는 120명, 일일이 개인을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는 1000명 수준이라고 알려져있다. 따라서 지역이나 인종처럼 거대한 집단 내에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되갚기 전략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다.

앞서 글에서 소개한  실험은 3주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2주차에서는 집단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3주차에서는 두 집단을 다시 결속시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다른 조건에서 실시된 실험에서는 2주차의 격렬한 대립이 다시 1주일만에 해소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련의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는 이렇다. 첫째, 우선 사람들은 선긋기에 능하다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가변적으로 구성한다. 둘째, 그 집단이 어떻게 구성되었든지 간에 사람들은 자기 집단이 어떤 본질을 공유한다고 믿으며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충성심을 보인다.

이 얘기는 (5)번으로 이어진다.

5) "사람들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집단끼리 뭉칠 것이다."

각각의 유전자는 독립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 집단을 어떤 방식으로 나누더라도 두 집단 사이에 유전적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 유전자 풀이 A/B 이런 식으로 딱 나눠질 수가 없고 일련의 연속선 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떻게 나누든지 모두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종이라는 구분이 매우 자연스럽고 유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피부색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30여가지가 넘고 똑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도 같은 유전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종'이란 개념은 과학적이기보다 사회적이다. 아일랜드인이나 이탈리아인은 미국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었다.

(4)에서 집단이 "어떻게 구성되었든지"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구성하는 인간 집단은 거의 모두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나치는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을 외모나 행동으로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서 골치를 썩였다. 그럴법한 것이 유대인들은 천년 이상 독일인들과 혼혈이 되었고 또 독일 시민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이스라엘)에 돌아왔을 때 그들 서로가 외모나 언어, 행동거지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피부색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서 그다지 동질적이지도 않고 서로 별로 친하지도 않다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다.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미국 흑인들도 그대로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서로 종족말살을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람들도 단일민족이라고 하지만 남방계와 북방계는 외모로 한 눈에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차이를 거의 의식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만약 훗날에 어떤 누군가가 한국 내에서 남방계와 북방계 사이에 인종주의를 선동한다면 그 의식할 수 없는 차이도 순식간에 눈에 띄는 차이가 될 것이다.

(6) "개인차가 유전자 차이에서 비롯된다면 우생학은 필연적이다."

이런 생각이 생겨나는 이유는 보통 환경적 차이는 환경을 개선해서 바꿀 수 있지만 유전적 차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드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근시는 100% 유전이지만 싸구려 안경으로도 교정할 수 있다.

근시인들은 학교나 직장에서 안경을 쓸 수 있는 혜택을 누리지만 이것을 혜택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연예계에서 못난이가 성형수술로 외모를 고치거나 음치가 컴퓨터로 목소리를 조작한다면 비난을 받는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당연하고 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철기술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태도에 기인한다. 우리는 낯선 보철기술에 대해 대체로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

보철기술의 문제는 그 접근성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고 대체로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이 더 높은 접근성을 가져서 기득권을 더 강화한다는 데 있지 보철기술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우리가 보철기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종류의 유전적 개인차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만약 흑인이 정말로 유전적 차이에 의해 백인보다 지능이 낮다면 그것은 학교나 직업에서 차별해야할 논거로 쓰지말고 그만큼 보철기술을 적용해야할 논거로 적용하면 된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평균적으로 기하점수가 낮다. 이 차이가 선천적일 수도 있고 후천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황당하지만 여학생들이 FPS 게임을 10시간만 하면 이 차이가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다. 보철기술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혹시 아는가. 흑인들이 고등어 세 마리만 먹으면 인종차가 사라질지도.


태그 : 심리학, 진화,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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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도덕
분류없음 | 2007/11/09 09:18
Tit - for -Tat과 윤리
Tit - for -Tat과 윤리(2)

내가 이해하기로 기린아님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이 우리가 필요로하는 도덕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되갚기 전략에 기초하여 협동을 설명하는 것은 단지 가족주의, 지역주의, 인종주의를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하는 도덕을 정당화하려면 종교나 전통 같은 비합리적 믿음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학이 대세니까 미래는 암울하다.

1.

새끼 오리는 태어나서 36시간 내에 처음 본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 다닌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어미 오리를 따라다니게 하여 새끼 오리의 생존률을 높이는 행동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새끼 오리가 이러한 행동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일부 재수없는 새끼오리는 지나가던 사람을 따라갈 수도 있다. 새끼 오리의 행동은 개체 수준의 인지 과정이고 이것이 확산되는 것은 유전자 수준의 진화적 과정이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되갚기 전략은 협동의 진화를 설명하는 상호 보완적인 모형들 중에 하나다. 그런데 새끼 오리가 어미를 따라 다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 어미를 따라다니는 게 아닌 것처럼 개체가 결과적으로 되갚기 전략을 쓰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실제로 되갚기 전략을 사용한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2.

기린아님은 "가족, 지역, 인종은, 태어날때 주어지는 것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관계중 가장 오래가는 것이다. 영원을 보장하는 종교를 제외할 경우(종교가 왜 협력이 잘 되는지 여기서 나온다.) 당연히 인간은 저런 오래가는 관계들을 중요시하게 된다."라고 하지만 이 주장은 두 가지면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가족주의는 호혜적 이타성이 아니라 친족 선택에 속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되갚기 전략으로 협동을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둘째, 가족은 둘째치고 지역, 인종, 종교는 인간이 중요시하는 관계가 아니다. 종교 갈등이 극심한 지역에서 3주짜리 캠프에서 다른 종교의 아이들을 섞어서 두 팀으로 만든 실험이 있다. 만약 기린아님의 주장대로라면 아이들은 3주짜리 캠프에서 같은 팀 아이보다 종교가 같은 아이들과 협동해야겠지만 팀 간의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2주만에 실험이 파국적으로 종료되었다. 한 쪽 팀의 아이들이 밤 중에 부엌에서 칼을 훔쳐 다른 팀의 숙소에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보고되었다.

3.

유전자 수준의 진화적 과정과 개체 수준의 인지 과정부터 다르기 때문에 진화심리학에서 바로 어떤 종류의 윤리를 정당화할 수 없다. 진화심리학으로 어떤 윤리적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인간은 원래 그래"라는 식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데 그 '원래 그런 행동'이라는 게 설명수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화심리학이 지역주의나 인종주의를 지지하고 우리가 필요한 도덕을 지지하려면 종교나 전통같은 '비합리적 믿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상당히 이상하다. 일단 지역주의나 인종주의는 오늘날 과학에 의해서 지지되기 보다 종교나 전통에 기반하여 주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만약 과학이 지역주의나 인종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종교나 전통이 있다고 해도 이런 '비합리적 믿음' 또한 진화적으로 획득된 형질이기 때문에 만약 진화심리학을 근거로 지역주의나 인종주의을 지지하는 사람은 역시 종교나 전통 또한 지지해야 한다는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태그 : 심리학,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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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분류없음 | 2007/10/30 16:46
종종 "복거일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본다. 고종석이라는 유명하다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내가 복거일의 글을 읽은 것은 잡문 몇 개 뿐인데 그 글에서 언어나 심리에 대해 인용한 내용은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예를들어 영어공용화를 주장한 어떤 글에서 그는 촘스키를 자신의 논거로 삼는다. 아이들은 언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게 촘스키의 주장인데 복거일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자고 주장하니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복거일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 존경받을 사람은 복거일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아닌가.

태그 : 심리학, 어리석음,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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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멍청이들
분류없음 | 2007/10/21 16:31
갓 태어난 병아리들도 매가 나타나면 숨고 기러기가 나타나면 그냥 잘 논다. 대단히 똑똑한 짓이지만 얘네들이 정말로 매랑 기러기를 구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아래 그림에서 왼쪽을 머리로보면 기러기고, 오른쪽을 머리로 보면 매다. 요컨데 형태 자체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 저 상태로 멈춰 있을 수 있는 매나 기러기는 없기 때문에 날아가는 방향을 보면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와 기러기가 가진 식성의 차이는 몸통에서 날개의 위치를 다르게 만든다. 이것을 두고 날개의 위치가 새의 육식성에 대한 대리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따라서 병아리는 날개가 앞쪽에 달린 종류의 새들만 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병아리를 잡아먹는 새들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대리 기능을 이용한 똑똑한 행동"은 사람에게도 있다. 샌 디에고와 샌 안토니오처럼 미국의 두 도시를 임의로 짝지어서 보여주고 어느 쪽이 인구가 더 많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독일 학생들이 미국 학생보다 더 잘 판단한다. 미국 학생들은 독일 학생들보다 미국 도시에 대해 더 잘 아는데도 말이다.

독일 학생들은 미국 도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도시가 인구가 더 많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독일 학생들이 이름을 들어봤을 확률은 도시의 인구 규모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상당히 정확하게 작동한다. 이 경우에는 '이름을 들어봤다는 기억'이 '도시 인구 규모'에 대리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미국 학생들은 미국 도시들에 대해 정보가 많아서 이런 식으로 대리 기능을 이용할 수가 없다.

로봇 청소기가 공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인식하게 만들려면 센서도 좋아야 하고 고도의 인공지능도 필요하다. 어느 로봇 전문기업에서 만든 로봇 청소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냥 무조건 직진이다. 벽이 나오면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간다.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이짓을 계속한다. 로봇 청소기를 이렇게 만들면 값을 아주 싸게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예는 모두 인식주체(병아리, 독일학생, 로봇청소기)가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똑똑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식대상(매, 미국도시, 방)이 인식주체로 하여금 똑똑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대리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똑똑한 멍청이라는 형용모순을 가능케한다.



태그 : 심리학, 역설, 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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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접근의 통속성 #2
분류없음 | 2007/10/03 01:53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

윗글에 대해 세 가지 반응이 있었다. 하나의 반응은 트랙백한 "도덕에 관한 회의"와 윗글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반응1]이고, 또하나의 반응은 '현미'님이 댓글에 단 것과 같이 도덕 판단이 직관적이고 쉽다는 데 대한 의문[반응2]이 들고 도덕적 접근이 다른 의미에서 효과를 지니는 것이 아니냐[반응3]는 것 이다. 이 반응들에 대해 각각의 답변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응1]에 대한 답변:

먼저 Arouet님의 "도덕에 관한 회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자연법적인 도덕체계"를 바탕으로 "인간들이 서로를 폭력으로 제압하기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 회의는 자연법적인 도덕체계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있다해도 개인을 짓밟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에서 말한 '도덕적 접근'은 사회적 문제가 개개인이 그러한 '자연법적 도덕체계'로부터 일탈한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를 교정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접근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폭력적인건 둘째치고 효과부터 의심스럽다는 게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의 내용이다.

[반응2]에 대한 답변:

우리 삶에서 내려야하는 대부분의 도덕 판단은 도덕 직관에 의해 결정된다. 도덕 직관은 언어 직관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과정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말하는 게 숨쉬듯 자연스럽듯이 보성에서 사람 4명을 죽인 어부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혐오감을 내기 위해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아이들의 경우 만 3~4세경이면 결과는 같지만 의도가 다른 행동에 대해 도덕 판단을 달리 하거나 사회적 관습과 도덕을 구분할 수 있고 만 4~5세면 법학에서 말하는 비례의 원칙을 판단에 적용할 수 있다. 도덕 판단은 결코 어렵지 않다.

도덕 직관은 추상적 사고에 의한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데 이게 실패했을 때 도덕적 딜레마가 생겨난다. 이런 딜레마는 그렇게 흔치 않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은 추상적 사고에 의한 정당화, 요컨대 반성적 사고를 하며 사는 경우조차 드물다.

[반응3]에 대한 답변:

반응3을 요약하자면 도덕적 접근이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어차피 그게 목적이 아니고 개인의 도덕성으로 문제를 돌려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감추고 기존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의도 때문에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예는 허다하다. 유대인 때문에, 빨갱이 때문에, 누구 때문에 등등. 그런데 이것이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의 한 배경을 이룰지라도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에 도덕적 접근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통속성의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도덕적 접근은 지배층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데도 별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체제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문제를 해결하든 완화할 필요가 있는데 도덕적 접근은 호도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금방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배층은 다른 호도책들 중에서 도덕적 접근을 선호하며, 대중은 거기에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지 설명되야 한다.

답은 간단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1차적으로 도덕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꾸로 지배층을 공격하고 체제를 뒤집어 엎고자 할 때조차 도덕적 접근을 하는 데서 드러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를 악당, 파렴치한으로 묘사하고 페미니스트들은 마초에 대한 도덕적 혐오감을 드러내지만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배층이든 대중이든 자본가든 사회주의자든 마초든 페미니스트든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접근을 한다.

태그 : 도덕, 심리학,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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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접근의 통속성
분류없음 | 2007/09/30 20:04
※ Arouet님의 도덕에 관한 회의에 트랙백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결함이 있으며 교육이나 계몽,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블로그 바닥에 나돌아다니는 글들도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심지어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공식적 매체에서도 이런 주장은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도덕적 접근의 통속성은 스스로가 사회 문제에 대한 현명한 접근법이 아닌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사회 문제는 제도, 역사,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개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이 가장 앞서냐하면 도덕 판단은 다른 종류의 판단과 달리 별 노력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뇌는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마음은 가능하면 적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도나 역사에 대한 판단은 인류 역사에서 지극히 최근에 등장했기 때문에 뇌에는 이것을 처리할 전문적인 회로가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기능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도덕 판단은 Pan속의 동물들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진화적으로 적응된 능력이다. 침팬지들에게 도덕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들에 대해 인간과 거의 똑같은 판단을 내린다. 인간과 침팬지의 공통 조상은 5~7백만년 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도덕 판단 능력은 그 이전에 생겼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다른 인지 기능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구축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고 빠르게 도덕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반대로 다른 인지 기능이 도덕 판단에 개입하기가 무척 어렵다.

최근 인지과학계에서는 도덕과 언어가 비슷한 구조와 원리를 따른다는 '보편 도덕 문법(Universal Moral Grammar: 줄여서 UMG)' 이론이 관심을 끌고 있다. UMG는 사회문제에 대한 도덕적 접근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의 도덕 판단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바른 말 쓰기 운동에 비견될만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문법적으로 말을 한다. 이 문법은 물론 학교 문법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바른 말, 표준어 등은 학교 문법인데 이것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흔히 '어감이 이상하다'라고 표현한다. 학교 문법은 암묵적 문법을 정합성이 있게 고친 것인데 암묵적 문법에는 이런 정합성이 없기 때문에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도덕 판단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도덕률은 사람들의 직관적인 도덕 판단을 토대로해서 정합성을 갖춘 체계를 만든 것인데 직관적인 도덕 판단 역시 이런 정합성이 없다. 도덕적 보상체계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도덕 감정은 '합리적' 잣대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몰고가던 트럭의 브레이크가 고장나는 바람에 5명의 아이를 피하기 위해 1명의 아이를 친 운전사"의 행동은 90%의 사람들이 도덕적이라고 응답하는 반면, "당장 장기를 이식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구할 수 있는 장기가 없는 5명의 중환자를 살리기 위해 무고한 1명을 납치, 살해하여 장기를 적출한 의사"의 형동은 90%의 사람들이 부도덕하다고 응답한다. 숫자만 따지자면 똑같이 5명을 살리고 1명을 죽였는데도 말이다.

아나운서나 성우들처럼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표준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런 노력을 강요하기는 어렵다. 인류 역사에서 전국민의 도덕 판단을 교정하려는 실험을 했던 체제가 있었지만 그 참혹한 결과는 그 체제마저도 완전히 공중분해시켜 이제는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만 겨우 남아있다.

언어는 바로 말로 실현되는 반면에 다행스럽게도 도덕 판단은 바로 행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도덕 판단을 교정하지 않더라도 행동을 수정할 수는 있다. 미국에서 음반 대신 MP3를 팔 수 있게 된 것은 사람들이 저작원에 대해 새로운 각성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MP3의 임의적인 유통을 법적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한편 사람들이 불법복제할 때보다 더 쉽게 음악을 다운받아 MP3 플레이어에 넣을 수 있는 기술적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습성은 120명 정도가 집단을 이뤄살던 구석기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신석기 시대로 접어든지도 불과 2만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여전히 그런 식으로 다루려는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블로그나 신문, 잡지에 글을 쓰거나 텔레비전에 나와 말을 할 때 그런 유혹을 살짝 접어두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돌 가수들도 평소에는 어떨지 몰라도 방송에 나올 때는 표준어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비속어는 사용하지 않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불행히도 표준어의 경우와 달리 우리 사회의 보상체계는 구석기적 본능에 굴복할 것을 권장한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접근보다는 도덕적인 접근을 선호하고 공식 매체에서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원고청탁과 출연요청을 받고 책이 팔리고 블로그 접속자 수가 는다. 난망한 일이다.

태그 : 도덕, 문법, 심리학, 언어, 인센티브,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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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거의 없는 사람
분류없음 | 2007/07/27 00:07
뇌가 거의 없는 사람 (세리자와 박사의 괴수퇴치연구실)

뇌 안팎에는 뇌척수액(cerebrospinal fluid)이라는 액체가 있다. 뇌 안쪽에 이 액체가 너무 많아지는  뇌수종(hydrocephalus)이란 병에 걸리면 그 압력 때문에 뇌가 제대로 성장하질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정상생활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는 데 이번에 프랑스에서 뇌가 거의 없다시피한데도 그걸 모르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발견됐다.

아래는 이 사람의 뇌를 단층촬영한 사진이다. 하얀 부분은 두개골이고 LV라고 쓰여진 부분이 뇌척수액이 찬 외측 뇌실(lateral ventricle)이다. 이 사람 뇌는 LV와 두개골 사이에 회색 부분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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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과 한 번 비교해보자. 아래는 The Whole Brain Atlas 자료를 바탕으로 위의 사진과 짝을 맞춰 편집한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은 투명 중격(septum pellucidum)으로서 그 양옆에 조그맣게 있는 까만 공간이 LV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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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뇌가 작아도 거의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뇌수종에 걸린다고 해도 뇌세포가 적다든가 그런 건 아니고(무게는 거의 똑같다) 뇌척수액의 압력 때문에 발달을 제대로 못하는 게 문제다. 운이 좋다면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란 능력에 힘입어 구조는 비정상이라도 기능은 정상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 비슷한 이유로 어릴 때 좌뇌나 우뇌 한쪽을 모두 잃고도 대부분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가진 어른으로 자라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은 뇌척수액을 뽑아내는 장치를 14살까지 달고 살았기 때문에 아마 그 동안은 뇌가 거의 정상적으로 발달을 했을 테고, 그후에 뇌척수액이 다시 차면서 뇌가 서서히 변형된듯 하다.

이런 일을 심리철학에서는 "다수 실현 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로 설명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뇌를 가지고 있더라도 지능이 있는 외계인을 생각할 수 있듯이 마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거다. 좀 더 현실감있는 예를 들면 컴퓨터에 PC도 있지만 Mac도 있고 하여간 여러 종류가 있듯이 마음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사례가 참 신기한 건 컴퓨터가 이런 종류도 있고 저런 종류도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컴퓨터 한 대가 5톤 트럭이 밟고 지나가서 납작해졌는데도 대충 돌아가더라.. 뭐 이런 수준이라는 데 있다.

뇌,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기관인지...

태그 : , 심리철학,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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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분류없음 | 2007/07/25 01:41
여자가 빙글빙글 돕니다. 시계방향일까요, 반시계방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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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좌뇌/우뇌랑 관련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보는 사람에 따라 도는 방향이 다르게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볼 때마다 달라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보고 있는 데 방향이 휙 바뀌기도 하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저 그림에서 앞뒤를 구분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뒤를 임의로 결정하게 되는 데 우리의 마음은 주어진 정보들을 가능한 일관성있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도는 방향도 다르게 보인다. 따라서 조금의 시각적 단서를 추가하면 한 가지 방향으로만 도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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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계방향